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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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1-15 23:33
시몬 아빠스님, 사랑 섬김 나눔의 기쁨 (3)십자가, 하느님 호소
 글쓴이 : 김영진
조회 : 2,276   추천 : 0  

(십자가 처형)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당신의 친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게 하셔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서 처형합니다. 십자가 처형이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양손, 그리고 발에 못질하여서 매달아 놓으면 온 몸의 체중이 이 십자가 구멍에 몰리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온몸의 피가 다 쏟아지고 지쳐서 죽게 하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후 3시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6시간을 그런 상태로 피투성이인 채 매달려 있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나의 죄 씻어주심)

작년에 방영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는 주님의 수난과 처형의 처참한 모습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이런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애통해하는 예루살렘 부녀자들을 뒤돌아보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그대들과 그대들 자식들 때문에 우시오 (루가 23, 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하여, 아니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처형당하셨습니다.

 

(십자가, 하느님 호소)

저는 종종 이런 묵상을 해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고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신 데도 불구하여 왜 그처럼 모진 처참한 방법을 택하셨을까? 여러분들 게세마니 동산에서 고뇌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인간의 좁은 머리로 어떻게 하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마는, 외람된 상상입니다. 하느님은 피투성이인 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가리키시며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제발 좀 알아다오하고 외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아둔하고 아무리 고집불통인 인간이라도 십자가를 보고는 뉘우치지 않겠느냐? 하는 하느님의 마지막 외침이며, 호소입니다.

 

(십자가, 하느님 사랑)

바오로는 주옥같은 서간들을 남기셨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고 직접 뵙지 못했던 바오로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바오로는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라고 고린도 전서 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 이지만 부름 받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인간 보다 지혜로우며 하느님의 약함이 인간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1 고린 1, 23-25)” 라고 설파하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나는 살아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 20).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1)” 라고 고백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그 넘치는 사랑에 감복한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옥중서간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역설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에나 기도와 전구로서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빌립 4, 4-7).” 이 얼마나 확신에 차고 감동적인 고백 입니까?

 

(그리스도와 일치)

그래서 바오로는 신도들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 인도되고, 동참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설파하십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로마 6, 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우리가 원래 흙에서 온 출신이고 게다가 하느님은 범죄한 우리를 당신의 귀한 피로 속량하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회개)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작년 성지주일에 손에 들고 다윗의 후손,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열렬히 영접하던 나뭇가지입니다. 같은 입으로 우리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쳐댔습니다. 시커먼 재는 우리의 출신 흙을 나타내고 동시에 우리는 배반을 상기시켜줍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그러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그리스어로 메티노니아(metanoia μετάνοια)라고 하는데, ‘돌린다, 바꾼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떠나있던, 하느님을 등지고 있던 머리를 돌려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 회두(回頭)‘이고, 하느님에서 떠나있던 내 마음을 돌려서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 회심(回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도 나는 회개할 것이 별로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극하고,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 서면 우리는 불충을 깨닫게 됩니다.

 

(용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하고 기도하는 데, ‘우리의 죄라는 말은 라틴말로 데비타 노스트라(debita nostra)”라고 합니다. ’우리의 빚을 뜻합니다. 이 말은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 23-35)를 연상시킵니다. (3)

 

(3) 시몬 아빠스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주님의 기도를 연결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무자비한 종의 줄거리입니다. 어떤 주인이 만 데나리온을 빚진 종의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다른 종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주인이 이를 알고, 만 데나리온 탕감 받은 종을 모든 빚을 갚을 때까지 형리에 넘겼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것은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서 나의 빚도 탕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채무 debt)’는 금전적 빚 뿐만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모든 빚을 포함합니다한편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 중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라틴어 원문은 et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인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우리가 탕감하오니, 우리 빚을 탕감해주시고입니다. 그러면 무자비한 종의 비유와 의미가 확실하게 연결됩니다. 이 두 말씀의 요지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이웃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라틴어 전례기도는 (debt)’ 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말 기도는 왜 (sin)’로 되어 있을까요? 우리 기도만 그럴까요? 우리 전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영어권 그리스도 교회, 즉 가톨릭(Roman Catholics), 성공회(Anglicans), 감리교(Methodists)에서는 (sin)’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스코틀랜드 의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에서는 (debt)’으로 쓰고 있습니다.

전례기도에 또는 로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마태오 복음에는 우리 빚을 용서하시고 (마태 6, 12)”로 되어 있고, 루가 복음에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루가 11, 4)”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을 따르는가’, ‘루가 복음을 따르는가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람어(Aramaic language)로 말씀하셨는데, 아람어 호바(ḥôbâ)’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듣고 기록하였을 것이고, 루가는 목격자 말을 듣고 기록하였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사랑에 대하여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빚은 갚지 않으면 당연히 죄가 되고, 여기서 죄는 금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어기는 모든 것이므로, 결국 하느님 사랑에 대한 빚(debt)’하느님 사랑을 어긴 죄(sin)’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출처 wikipedia 백과사전https://en.wikipedia.org/wiki/Lord%27s_Pr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