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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11 16:19
토마스 머튼의 영성과 하느님 체험 - 평가 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10   추천 : 0  

5. 머튼의 신비 체험에 대한 평가

         

토마스 머튼의 신비체험은 의식의 변형, 관상의 새로운 관점,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다른 종교들에 대한 개방을 가져왔다. 동시에, 그는 다른 종교, 특히 불교와 개방된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그 전과는 다른 내적 체험을 얻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그리스교의 관상에 대한 더 깊은 진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은 내적-신비적 체험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며, 어떤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지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머튼의 관상적 삶에서의 신비적 혹은 내적인 체험은 세가지 주제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 의식의 변형 안에서 종교적 체험의 중요성,

2) 관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개발,

3)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위한 내적 체험의 가치.

 

5.1. 인간 의식의 변형 안에서 종교적 체험의 역할

 

머튼의 삶과 작품은 인간 의식의 변형 안에서 종교적 체험의 중요한 역할을 예증하고 있다. 그의 다양한 신비적 혹은 내적인 체험들은 도덕적, 심리적, 종교적, 영성적, 그리고 보편적인 새로운 의식을 촉진하게 했다. 예를 들어,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의 하늘의 비전은 머튼을 위한 새로운 종교적 의식을 가능하게 만든 구약의 초월적 하느님의 체험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루이빌 거리에서 일상의 사람들안에서 본 하느님의 비전은 그의 도덕적, 심리적 치유와 사람들 안에 내재하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인간적 의식을 촉진시킨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i] 즉 사람들 가운데 계신 신약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폴론나루와의 부처님 상들 앞에서의 깨달음의 체험은 그에게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의식을 갖게 해 주었으며 이는 성령의 보편성 체험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비적 혹은 내적인 체험을 통한 머튼의 지속적인 의식의 변형은 종교적 체험의 두가지 중요한 기능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종교적 체험은 신적인 의식과의 일치를 통한 새로운 의식을 촉진시킨다, 2) 종교적 체험은 새로운 개인적 의식을 통하여 사회적 의식의 변형에 영향을 미친다.

 

첫번째, 머튼은 신비적 혹은 내적 체험이 신적 의식과의 일치를 통해 자아가 새로운 의식으로 깨어나는 것을 도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내적 체험과 신적 의식의 관계에 관하여 샤논은 수용과 저항의 어떤 이중적인 움직임이 있다고 설명을 한다. 먼저 머튼은 내적-신비적 체험을 통해 그 안으로 이끌리게 되고, 신적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넘어선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 내적-신비적 체험을 축복으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아직 그 체험의 축복과 자신에게 자리한 신적 선물의 불분명한 무게 사이에서 가해지는 긴장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변형된 의식으로 이끄는 이 긴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사라지고 신적 의식을 자신의 내면 안에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ii]

 

머튼은 이러한 상태는의식에 대한것이 아니라 주체가 사라지는 것 안에서 순수한 의식이라고 언급했다.[iii] 그는 자아가 더 이상 주체로서 그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신적인 의식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無我로서 그 자체를 체험하는, 순수한 의식의 최종 체험을 초월된 자아”(Transcendent Self) 라고 표현했다.[iv]

 

초월적 체험 안에서, 개인들은 실제로 자기-변형을 겪게 되고 자기-증여, 사랑, ‘놓아버림 (letting-go), 황홀경, 하느님 안에서 용해된 자아로서의자기 자신을 깨닫게 된다.[v] 그래서 머튼은 인간은 의식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하느님 혹은 궁극적 실재와 일치할 수 있으며, 세상 안에서 존재의 새로운 상태와 신적 의식이 현현(顯現)되는 이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vi] 

 

둘째로, 머튼은 사회의식의 변형을 위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길인 개인 의식의 변형에 대한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 시기에 인간과 사회의 문제들은 개개인 안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 의식의 변형을 강조했다.[vii]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립스키 (Alexander Lipski)는 머튼의 이 접근 방법에 대해 냉혹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변형을 통하여 머튼이 과거, 유럽의 중세나 혹은 아시아와 같은 비-서구 세상에서 더 완벽한 사회를 찾고 있었지만, 그는 진정한 관상적 문명이 아시아에 전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viii]

 

그러나 립스키는 관상은 서구적 감각에서의 문명이 아니라, 하느님 혹은 궁극적 실재와의 일치를 통한 내면의 변형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으며, 머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우기를 제안했던 깊은 관상적 전통이 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역시 간과하였다. 립스키는 또한 머튼에게 내적 체험의 확장으로서의 사회 참여는 더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세상 안에 사회적 의식과 진정한 보편적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ix]

 

다른 한편, 머튼은 1960년대에 종교적 체험 위에 형성된 새로운 개인의 의식은 세상을 향한 개방과 사랑, 자비와 자유, 그리고 거룩함의 새로운 지평을 세울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게다가, 불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머튼은 인간 의식의 변형은 동서양의 종교적 전통들 모두에서 인간 여정의 보편적 토대요 공통된 목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x] 그래서 그는 영적 여정의 마지막 통합은 심리학적 의식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자기-비움과 자기-초월을 통한 전적인 내면의 변형(total inner transformation)” 보편적인 의식(universal consciousness)”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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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의 영성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일치를 통한 의식의 변형” (transformation of human consciousness)에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 관상적 체험, 신비적 체험 등은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머튼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고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상적 체험은 전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얻고 싶을 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할 수는 있습니다. 마치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적 변화와 성장에 나아갈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와 쇄신이 가능하다고 머튼은 보았습니다. 만약 머튼이 관상적 체험을 통해 진정 깨어나지 못했다면 그 역시 그의 시대의 여느 수도승과 다름 없이 전통적인 엄률 시토회의 규율 안에서 순종과 침묵과 고독, 그리고 기도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깊은 하느님 체험은 그에게 자신의 전통을 넘어 다른 문화적 종교적 전통에 개방하도록 이끌어 주었으며, 그 시대의 여러 사회 문제들, 특히 전쟁과 폭력, 정의 등에 관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머튼은 종교간 대화나 사회 정의 운동은 깊은 관상적 삶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께서는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모토 아래에서 수도승들이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했으며, 진정 일은 기도의 연장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수도승들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정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하느님과의 일치의 시간을 가질 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은 성당이나 조배실에서 하는 기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요 만남으로 정의한다면,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게 많습니다. 머튼이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심지어 불상 앞에서 하느님의 영을 체험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하게 다가 오시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이라는 틀을 부수어 버리고, 늘 개방된 자세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장 하느님을 잘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나를 내어 주는 사랑은 하느님을 바로 만나게 해 주는 지름길 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i] 하바나 (Havana)에서 머튼은 하늘은 바로 내 앞에 여기 있다: 하늘, 하늘!”루이빌 (Louisville)에서 그는 하늘의 문은 모든 곳에 있다고 말했다. 폴론나루와 (Polonnaruwa) 에서, 그는 하늘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비움이요 모든 것은 자비다라고 깨달았다. See SSM, 312; CGB, 156; AJ, 235.

[ii] ZBA, 24.

[iii] See Shannon, Silent Lamp, 15.

[iv] 앞의 책, 71-72.

[v] 앞의 책, 24. 그런데, “잃어버리거나 혹은 사라지는 자신의 자아의 개념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아주 다르다. 불자들은 자신의 자아가 사라지고 空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의 무아로서 이것을 묘사했다. 힌두교에서는 통합된 존재, Atman (자아)Brahman (존재의 우주적 근원)이며, 자아의 잃어버림에 의해 모든 것이 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자아의 잃어버림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별적 자아는 하느님 안으로 사라지지 않지만, 자신의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vi] See David Cooper, “Thomas Merton and the New Theology,” in Toward an Integrated Humanity, 158.

[vii] See AJ, 332-333. 머튼은 인간의식의 변형은 병으로 신음하며 영적인 변형을 갈망하는 현대 세계에 긴급히 요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인들이 이 문제는 더 이상 단순히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사회의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See FV, 174.

[viii] Alexander Lipski, Thomas Merton in Asia: His Quest for Utopia (Kalamazoo, Mich.: Cistercian Publications, 1983), 1, 11.

[ix] AJ, 317.

[x] 머튼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인간 의식의 변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앞의 책, 332-333. 달라이 라마 역시 영적 수행을 통한 새로운 의식의 개발은 참된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회 의식의 변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See The Dalai Lama, “His Holiness, the Dalai Lama,” in Merton by Those Who Knew Him Best, ed. Paul Wilkes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4), 146.

[xi] CWA, 203-206; AJ, 340,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