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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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13 15:48
토마스 머튼의 영성과 하느님 체험 - 평가 2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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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관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 안에서 머튼의 공헌들

         

우리는 관상의 주제 아래 기록된 머튼의 초기와 후기 글들의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동양의 종교적 전통에 대한 접근이 관상에 대한 통합적 이해에 영향을 끼쳤으며 관상을 보다 현대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직접인 관상의 체험들에 대한 반영 위에, 그는 하느님 혹은 궁극적 실재와의 일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상을 통해 어떻게 이 일치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관상에 대한 머튼의 변형 관점은 두 가지 방법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는 관상을 향한 접근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였다

2) 그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현대화 하였다.

 

첫째, 머튼은 관상의 단계를 명료화 하였다: 관상의 출발점은 참 자아를 찾는 것이며,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 혹은 궁극적 실재를 향한 깨어남이고, 열매는 다른 이들을 향한 개방과 자비로운 사랑의 나눔이었다. 머튼은 하느님을 찾는 것을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자아의 내부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삶의 여정은 내면의 여행입니다: 이것은 성장과 깊이의 문제, 우리의 마음 안에 사랑과 은총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위대한 승복의 문입니다라고 주장했다.[i]

 

그는 만약 관상적인 삶을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물러남, 고요, 은둔, 침묵의 삶과 같은 전통적인 범주들이나 수도승들을 위한 엄격한 금욕적인 훈련들에 국한시킨다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관상은 끝나 버린삶이라고 주장한다.[ii] 그러나, 만약 관상적인 삶이 새로운 자아-발견의 과정을 넘어, 진정 영적 훈련들을 거쳐, 그리고 동시에 신학적으로 건전하다면, 관상적인 삶은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iii]

 

내적 자아의 의미는 머튼에게 관상의 토대요, 중심적인 관심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깊은 내면과 그 바탕에 현존하시고 관상의 씨앗이 그 내적 자아 안에 뿌려져 있기 때문에, 가장 깊은 자아는 일상의 의식에서의 혹은 에고”(ego)가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하느님과의 가장 근원적인 일치에 의해 지탱되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실재인 내적이고 숨겨진 자아였다.[iv]

 

그에게 있어 관상의 목표는 내면의 세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감으로써 하느님과의 이러한 일치를 이루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깨어난 사람의 삶은 관상의 열매인 다른 사람을 향한 개방과 자비로운 사랑으로 드러나게 된다. 머튼의 관상에 관한 새로운 길은, 대승불교의 전통, 특별히 참 자아를 찾음으로써 해탈에 도달한 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유와 자비로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보살의 길과 유사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 사이에서 관상에 대한 유사성은 이어지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관상에 관한 머튼의 새로운 개념의 두번째 공헌은 그가 관상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인간 삶의 모든 부분으로 확장했다는 것이다. 성숙해진 머튼은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관상이 인간 삶의 단지 한 부분이라고 여기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관상가에게 인간의 모든 삶은 관상입니다.”[v] 그는 관상적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단지 봉쇄 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수도승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20세기 중반까지, 관상은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되어서는 드물게 논의되었으며, 신비 신학은 황홀경이나 비범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오늘날 어떤 측면에서 이미 신학적으로 의심되는 관상적 삶이란 용어는 -활동적삶으로 점점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관상 수도원에서 수도승들만을 위한 것으로 수동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았다.[vi]

 

그러나 머튼에 따르면, “궁극적 근원 안에서 실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순수한 경험은 개인에게 있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관상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하나됨의 체험과 초월적 일치이다.[vii] 실제로, 수도원의 봉쇄 구역 밖에 있는 많은 관상가들이 하느님과 궁극적 실재의 어떤 경험을 갈망하고 있고, 그들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인격적인 실재로서 새로운 의식을 얻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머튼은 관상과 신성함의 씨앗들은 인간의 영혼들 안에 심어져 있으나, 성장을 중단한 채 놓여 있습니다. 이 씨앗들은 싹트지 않았습니다. 자라지도 않았습니다라고 지적했다.[viii]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내적 자아를 찾기 위해 관상의 기도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고 있으며, 자기-변형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 혹은 궁극적인 실재를 찾기를 희망했다.

 



[i] AJ, 296.

[ii] CWA, 224.

[iii] 앞의 책, 224-226.

[iv] 숨겨진 자아(the hidden self)존재의 궁극적 근원 (the Ground of being)에 대한 머튼의 이해는 힌두교에서 Atman (the Self 자아)Brahman (the Universal Ground of Being 존재의 보편적 궁극적 근원)에 관한 그의 이해를 반영하는 듯하다. 1967, 힌두 학자인 Amiya Chakravarty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머튼은 궁극적 존재”(Being), “성령” (the Pneuma), “침묵” (Silence)과 동의어로서 AtmanBrahman에 대한 그의 이해를 묘사했다. 게다가, 1965년에 힌두 학자인 Philip Griggs에게 보낸 편지에서 머튼은 인간은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신적이며, 이 말은 곧,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는 인간의 본성 안에서 존재론적인 일치가 아니라, 사랑과 성령,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일치라는 의미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것은 힌두교의 성인들과 다른 어떤 이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러나, 그는 “[힌두교의 여섯 개 교단 중의 하나인] 베단트적 (Vedantic) 위치가 본성의 개념으로서 Atman을 취급함으로써 그것의 충만함을 실제로 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해의문을 가졌다. See HGL, 115, 339-340. 자기-초월의 전망으로부터, 그는 불교의 空,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수피즘의 fana (소멸) baqa (환생)와 같은 맥락에서 Atman의 자기-실현을 고려하고 있다. See AJ, 310.

[v] SS, 303.

[vi] SCL, 342.

[vii] IEW, 65.

[viii] IE,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