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김종필 폴리카르포 수사신부

“성탄 축하합니다!” 오늘 여기 우리는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천 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던 분을 기억합니다. 죄와 어둠 속에 사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의 성탄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오늘 만민의 구원자이신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고 주님의 평화가 온 세상에 퍼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1,1-18)의 시작부분은 ｢로고스(말씀) 찬미가｣로 초대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 찬미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4)

이렇듯이 한 처음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마치 오페라의 서곡처럼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 내용을 앞서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

만물을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느님의 신비로운 임재(臨齋)이기에 ‘육화의 신비’라고도 합니다. 그분은 바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은 끝없는 묵상을 낳는 소중한 예수 성탄 메시지입니다.

 제2독서인 히브리서(1,1-6)의 시작은 “하느님께서는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1-2)라고 구원사를 장중하게 요약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로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라고 선포합니다.

 제1독서인 이사야서(52,7-10)의 말씀에는 우리가 친숙하게 만나게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7)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주님의 구원을 보리라.”(10)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이룩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오늘 전례 중에 새롭게 구원자이신 메시아의 탄생의 기쁨이 예언자를 통하여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50년 전, 1962년 10월 11일 교황 요한 23세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1881.11.25~ 1963.6.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을 선포했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톨릭사회교리서 반포 20주년을 맞아,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신앙의 해’로 선포하면서 ｢믿음의 문｣이란 자의 교서를 반포했습니다.

1958년에 77세로 교황에 피선되셔서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전반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시고 1963년에 선종하신 요한 23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박물관 경비원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파격적으로 헌신하셨던 요한 23세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는 소신학교 시절인 열네 살 때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서른여덟 권의 ｢영혼의 일기｣Giornale dell' Anima를 써서 남겼습니다. 그의 일기와 편지에 한결같이 담겨 있는 정신은 가난과 소박함입니다. 그의 자비로운 정신은 “생명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하고자 의식적으로 꾸준히 가꾸어 온 신앙의 결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상처 없는 독수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독수리뿐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존재의 산이 있고, 건너야 할 자기 존재의 대양이 있습니다. 고민과 아픔, 상처와 고통, 고뇌와 절망, 죽음에 이르는 고독에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은 바로 고민과 고통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삶의 자리가 아닌 짐승의 자리에서,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아픔과 상처, 고민과 고통 중에 있는 누군가에게, 어느 가정에, 어느 공동체에 고요 중에 얼굴을 드미시는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귀, 하느님의 가슴으로 그 사람, 그 가정, 그 공동체를 향할 수 있다면 바로 구유 같은 변방의 삶의 자리에서 오늘도 메시아 탄생의 흔적을 찾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2년 12월 24일 밤에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쓴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오소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께 드릴 말과 맡겨 드릴 고통이 많사옵니다. 원욕(願慾)･ 약속(約束)･ 희망(希望)이 많사옵니다. 오, 아기 예수님이시여!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당신 이마에 입 맞추고, 한 번 더 영원히 저를 송두리째 드리고 싶사옵니다. 오소서! 예수님이시여!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시옵소서. 제 초대를 받으시고 어서 오시옵소서.”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교황에 선출된 1958년 성탄절에, 그는 예고 없이 로마의 ‘밤비노 아동 예수’ 아동 병원을 찾았습니다. 어린 입원 환자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한 꼬마가 “교황님,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요한 23세는 “어렸을 때 이름은 안젤로이고, 군대에서는 주세페라고 불렸고, 지금은 요한이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력을 잃은 어느 소년의 침대 곁에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도 모두 눈 멀 때가 많단다. 어쩌면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는 선물을 받았는지도 몰라.”

그리고 그다음 날인 12월 25일 에는 로마의 ‘레지나 첼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1,200명의 죄수들을 방문했습니다. 요한 23세는 교황모를 벗어 들면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올 수가 없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어떤 훈계도 하지 않고, 어린 시절에 놀던 일과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여기 감옥으로 왔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내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다음번에 집으로 편지를 보내실 때 교황이 여러분을 찾아왔었고 바로 다음 미사 중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부인들과 형제자매들과 가족들을 기억할 거라고 꼭 쓰셔야 합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 오신 구세주,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는 말씀이 오늘 여기 있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의 길로 들게 합니다. 내려감의 길, 나눔과 섬김의 길에서 주님의 성탄이 우리의 성탄이 되고,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오늘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공유할 구원자의 날입니다. 거듭 새롭게 주님의 성탄에 “생명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우리의 탄생을 꿈꾸며 이사야서 61장 11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이사야 61,11).//壬辰年 聖誕節에 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