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카 9,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도입부

오늘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성대히 지냅니다. 1784년 한 알의 겨자씨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100년에 걸친 지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뿌리를 내려 튼튼히 자라났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천주교는 좋은 평판을 받고 있고, 타종교에 눌리지 않을 만큼 신자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호시절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가 점점 세력화 혹은 조직화 되어간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순교 성인들의 전구로 한국 천주교회가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시대가 져야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울러 오늘 영명축일을 맞은 안 호영 베드로 신부님과 이 윤일 요한 수사님께서 영육 간에 건강하시고 수도여정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강론

작년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소위 프란치스코 효과를 예견하는 언론 기사가 많이 나왔다. 1984년과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국방문 이후 한국교회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5월, ‘2014년도 한국 천주교회 교세통계’가 발표될 때 영세율이 2013년도에 비해 5%가 증가했다고 해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주일미사 참석율이 오히려 20.7%로 추락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교회 언론에서는 1980년대 이후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져 왔지만 이를 참다운 신앙생활이나 공동체 활동으로 이끌 동력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교세통계에 잡힌 신자가 556만 명인데, 그야말로 작은 나라만한 인구입니다. 여기에 주일미사 참석률 20.7%를 적용해 보면 11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수많은 학교, 병원, 사회복지 기관 그리고, 사회각계 각층에 포진된 신자들을 보면 이제 한국 천주교회가 더 이상 힘없는 소수집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힘없는 소수집단이었던 시절, 교회는 핍박과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배층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혹여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생트집을 잡았고, 반대파 중에 교인들이 있으면, 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박해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민중들도 자신들이 지금껏 살아온 관습을 부정하는 교인들을 따돌렸으며, 친족이나 마을공동체에서 배제시켰습니다. 한불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온 이후에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천주교 신자들은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는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 밥 먹기 전에 꼭 이상한 시늉을 하면서 중얼거리는 사람, 혹은 베드로니 바오로니 하는 괴상한 서양이름을 별호로 쓰는 사람정도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의 정신은 폐쇄적인 신자 공동체 안에 묶어, 사회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세상 구원을 위한 진리를 가르친다는 당시 천주교회의 모순적인 실태였습니다.

혹독한 박해의 트라우마여서인지 일제 강점기에 한국 천주교회는 몸을 사렸습니다. 1909년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토마 의사를 살인자로 단죄하여 파문시켰습니다. 1919년 조선 천지에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개신교, 불교, 천도교 대표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한국교회 주교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며 용인했고 태평양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시국미사가 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주류 왕따 종교로 비굴하게 몸을 사리던 천주교가 한국사회에서 호감을 얻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건실한 종교로 탈바꿈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1984년에 거행된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행사와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일 것입니다. 두 번에 걸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그동안 사람들이 전혀 귀기울여주지 않고 꺼려했던 복음의 메시지를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행사들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의 저력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독재정권 시절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교회의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이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성당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외적 요인보다는, 박해 시대 때부터 교회 안에 면면히 내려온 순교정신이 저력의 원천이 되었다고 보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순교정신이란, 교회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면서, 앞뒤 재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정신이 아닙니다. 순교정신은 자기 십자가를 흔쾌히 지고 가려는 용기, 참된 삶을 위하여 거짓된 삶을 훌훌 던져버릴 수 있는 기백, 이웃과 형제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안목을 말합니다. 이 땅에 들어온 복음은 사람들에게 허례허식적인 유교관습, 불평등한 사회 계급, 차별적인 인간관, 무절제한 생활 등 많은 것을 버리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시 시대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교회설립 초기에 혁신적 성향의 남인계열 지식인들이 입교를 많이 했습니다. 이 현상은 모든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와 폐단들을 복음의 정신으로 풀어나자는 운동으로 해석됩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은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복음정신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신자들은 교우촌이라는 독특한 공동체를 건설하여 이 운동을 펼쳐갑니다. 교우촌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인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습니다. 교우촌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이상향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아침저녁으로 같이 모여 조과 만과를 드렸고, 함께 옹기를 구워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들은 피를 나눈 동기간 보다 더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교우촌에는 사랑이 넘쳤고, 공동체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삶은 고단했고, 드러나지 않았지만, 훗날 시대의 선구자적인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 시대를 위해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봅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교회가 져야할 십자가는 당연히 억압당하는 인권과 짓밟힌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여 고통 받던 시절에 교회가 져야할 십자가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무식하여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하던 시절에 교회가 져야할 십자가는 그들을 가르칠 학교를 짓고, 계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게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파행적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행되고 있는 상태이고, 나라는 부강해졌고, 국민들은 똑똑해졌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원래 교회의 소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원천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교회는 부차적인 일을 하는 데 보다, 복음 그 자체, 하느님 말씀을 전해주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교자들이 세웠던 교우촌 공동체가 답을 제시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이 된 사랑의 공동체 건설. 이 과제는 몇몇 소명을 받은 사람들, 특히 수도자나 성직자들에게만 부여된 십자가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함께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복음정신으로 세워진 공동체가 이 땅을 채울 때 정치적, 지역적 이해관계로 갈라져 있는 우리 겨레가 하나가 되리라고 봅니다. 모쪼록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합심하여, 각자가 속한 수도원, 본당, 가정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변모되고, 그리하여 우리 겨레가 하나 되는데 큰 역할을 해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