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다해)

서원 은경축 미사 강론

+ 루카 1,1-4; 4,14-21

오늘 복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복음선포를 위해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갈릴레아보다 더 중요한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예수살렘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이자 이스라엘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국경 부근에 있는 갈릴래아는 당시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따라서 이민족들과 접촉이 많았고 대다수가 혼혈인으로서 종교적으로 순수하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멸시하며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로 단정 지었습니다. 또 경제적으로도 착취 받던 곳이었습니다.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였기에 땅이 비옥하고 자원도 풍부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착취가 심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갈릴래아는 가장 멸시받고 착취당하며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즉, 억압의 땅, 고통과 시련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첫 복음선포지를 바로 이런 곳으로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여러 지방에서 가르치셨고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 예수님의 관심은 가난한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기에 복음선포의 첫 장소로 갈릴래아를 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단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난한 이들을 말합니다. 즉, 하느님 구원의 기쁜 소식에 마음을 열고 있는 이들입니다. 구약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나빔, 즉 ‘야훼의 가난한 이들’입니다. 돈도 권력도 없어 하느님 이외에는 그 어디에도 희망을 둘 수 없는 이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와 권력을 우상으로 삼고 그런 것들에 의지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오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래아로 상징되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분명 예수님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불편한 소식이 될 수도 있고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세적 부와 권력, 온갖 세속적 가치들을 숭배하며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니 저와 다른 다섯 명의 형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던 옛 성당에서 수도자로 첫 서원을 한지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은 길을 달리했고, 현재 저를 포함한 네 명이 서원 은경축을 맞이했습니다. 원래 1991년 1월 25일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에 첫 서원을 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내일이 25년째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루 앞당겨 오는 25주년 미사를 봉헌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주일미사로 성대하게 더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게 하려는 공동체의 특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점 감사한 마음도 들지만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더 앞섭니다. 이 자리에는 서원 50주년, 60주년, 심지어 70주년이 훨씬 넘으신 까마득한 선배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25주년은 어디 명함을 내밀기도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요즘 누가 환갑잔치를 한다고 하면 왠지 자타가 모두 좀 어색하게 느끼듯이 말입니다.

언젠가 충북 보은에 있는 카르투시오회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제가 언제부터 이 생활을 하셨냐고 약간 외람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고개를 갸우뚱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가 ‘적어도 30년은 훨씬 넘었겠지요?’라고 물으니, 남의 이야기를 하듯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수녀님은 이탈리아분인데, 실제 수도생활을 하신지가 40년은 족히 넘으신 것이 확실합니다. 이 일은 제게 여러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얼마나 하느님만을 향해서 달려 왔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겨를도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생각과 회상을 하며 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수녀님의 경우는 하루하루 하느님 안에 머무는데 온갖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했기에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서원 25주년을 맞이하여 제가 느끼는 감정은 딱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곧, 부끄러움과 감사입니다. 수도자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산다고 살았지만 돌아보면 마냥 철없던 시절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숱한 넘어짐과 일어섬, 고뇌와 갈등, 슬픔과 기쁨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지금 와서 제가 하느님께 서원한 바를 얼마나 잘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이 모든 부끄러운 과정을 통해 하느님은 지금 이 자리에까지 저희를 이끌어오셨고 또 앞으로도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은총과 자비가 없었다면 저희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저희를 수도자로 양성시켜주고 여러 가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인내와 사랑으로 돌봐주고 포용해준 공동체에도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늘 베네딕도 성인의 다음 말씀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해 결코 실망하지 마라.”(성규 4,74)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여정은 우리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로 가는 여정입니다. 지나온 삶의 모든 궤적이 이를 확신시켜 줍니다. 올해 자비의 해를 맞아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묵상하고 그 자비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서원 25주년, 수도자로 사반세기를 보내면서 하느님 앞에 했던 서원을 다시 갱신하며 또다시 초심자의 마음과 자세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수도자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매일 불에 불을, 열정에 열정을, 열의에 열의를, 갈망에 갈망을 더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천국의 사다리 1,6) 매일이 새로운 날이고, 은총의 시간이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수도자는 하느님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는 야훼의 가난한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만을 희망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이 지상여정을 마치는 날, 이 제단 아래에서 하늘을 향해 다시 누울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 모두의 기도를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축하를 주고받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끝으로 언젠가 한 카르투시오회 수도승에게 들었던 다음 말로 강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영원한 사랑의 선물에 응답하기에 우리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미 하느님께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생각한다면, 우리 삶은 그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셔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