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예술가 5인전 개막에 부쳐

강연: 테오 순더마이어(독일 하이델베르크 신학대학 명예교수)

번역: 채수일(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토착적 그리스도교 미술의 발전은 세 단계로 구별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모방 특징을 보여준다. 서구 예술이 너무 막강해서 전통적인 교육의 기본원칙이기도 한 모방을 통해서 접근하는 단계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문화토착화(Inkulturation)가 따르는데, 예술이 고유문화의 영향을 받은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통해 촉발된 단계에 의해서 해체되는데, 이 단계에서는 이전의 두 단계의 요소들이 통합되거나 혹은 다양한 방식으로 국제적으로 타당한 스타일과 양식을 따른다.

예술사적으로 전개된 이런 세 단계는 한국의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에서도 볼 수 있다. 김일영. 변진의 선생, 두 분의 작품세계는 아주 분명하게 분리되는 형태는 비록 아닐지라도 두 번째 단계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색유리 작업을 하는 장상건 선생은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에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고, 이춘만.한혜선 선생은 세 번째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영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로댕의 조각 작품에 매혹되었다고 하는데, 최근의 작품 속에서도 로댕에 대한 매혹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81년에 서울대학교 미대 조각과를 졸업, 1985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6년에 그는 위대한 조각예술의 고향인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 1989년에‘Nationale Accademia Belle Arte di Roma’에서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쳤고, 지금 대구가톨릭대학교 예술대학 환경조각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일영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로뎅이 현대(Moderne)에로 넘어가는 프랑스의 과도기에 서있듯이, 김일영 선생의 작품도 현대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서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김일영 선생은 서구의 조각예술을 채용하고 있다. 고전주의(Klassik) 예술가처럼 그는 반듯한 표면에 사실적으로 돌에 형상을 구체화할 수 있다. 초기 표현주의(expressionismus) 시대에는 예술가가 발가벗은 온 몸으로 대지와 물, 무엇보다 빛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판화와 조형예술의 다양한 테마였다. 마찬가지로 김일영 선생의 인간상과 토르소는 전적으로 자연의 빛 공간을 향하여 구상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작품을 둘러싼 공간에게도 특징을 부여하는데, 때로는 성큼 성큼 나아가는 동작, 혹은 안으로 물러서는 동작으

로 그렇게 한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엄성과 힘과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회적 관계망 안으로 힘차게 참여하도록 호소한다. 그렇다고 사회에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숙고하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게 한다. 김일영 선생의‘마리아 형상’들은 - 문화토착화 단계를 대표하는 작품들인데 - 전적으로 그들의 몸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향하여 집중되고 있다. 그의 마리아 형상들은 내면세계에 대한 경청에서부터 비롯되는 고요함을 발산하고 있다. 믿음에로의 내성이야말로 김일영 선생의 마리아 형상들이 지니고 있는 힘이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는 시스티나 경당(Sixtinische Kapelle)의 제단 뒤에 ‘최후의 심판’(1534-1541)을 형상화했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두 발가벗은 형태로 그렸다. 후에 교황의 지시로 허리부분에 덧칠을 당해야 했다. 내가 아는 한 미켈란젤로가 그린 고문 말뚝에 묶인 그리스도상 이래, 19세기 마지막까지 예수를 발가벗겨 형상화한 그림이나 조각은 없었다.

김일영 선생은 한국에서 이런 타부를 감히 깨려고 한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발가벗은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 때문에 그에 대한 불쾌감이 유발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용기이다. 아니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여성주의적 태도이다(1997년 청동구상 참조). 이탈리아 조각가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는 가톨릭 경건에는 물론 개신교의 경건주의에도 널리 영향을 끼쳤는데, 그가 그린 감미로운 그리스도상도 그에게는 본보기가 될 수 없는 것 같다. 김일영 선생은 이 작품으로 예술적인 막다른 골목,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고 어떤 예술적인 전망도 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음이 분명하다. 근본적인 회개와 전향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을 해방할 수 있다.

2000년의 작품, 십자가상은 이런 탈출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몸은 뼈와 힘줄까지도 여위고, 고통스럽게‘텅 비어있다’. 이사야서 53장, 하느님의 종의 노래는 그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런 해골 같은 모습 앞에서 우리는 과연 예수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 김일영 선생은 쇄약해진 몸이 하늘의 예루살렘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게 함으로써 자기 나름으로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이 점은 변진의 선생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변진의 선생은 1961년 서울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에 서울대학교를 거쳐 1968/9년에는 파리의‘Ecole du Louvre’에서 수학한 후, 수원여자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은퇴했다. 그녀의 작품은 두 개의 차원으로 나뉠 수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M. Rilke)는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 :‘ 우리는 암시와 언어로 세계를 서서히 습득한다. 어쩌면 세계의 가장 약하고 위험한 부분을’(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오랫동안 로댕의 개인비서였다. 인용문은 그의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Sonett an Orpheus) Teil II, XVI이다)

우리는 릴케의 이 말을 변진의 선생의 예술 활동에 대한 모토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연작‘섬’에서 드러나는 여러 색깔들, 다양한 형태의 자유로운 구상들의 결합은 자연의 아름다움, 물의 순수함, 자연 그대로의 섬에 대한 찬미와 같다. 약간의 붓질로 그녀는 대지와 물로서, 우리의 도시화된 세계에서 얼마나 그녀가 신선한 공기와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그녀는 나무와 강에서 느끼고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위협을 받고 있다. 꿈과 같은 거의 향수에 젖은 아름다운 그녀의 구상작품들은 동시에 위협받고 있는 자연을 간과하지 말라는 호소이다. 자연을 찬미하는 사람만이 자연을 지킬 수 있다. 어떤 정보를 구체화하는 태도를 그녀는‘출애굽’(Exodus)이라는 작품에도 적용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는 전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성서의 주제를 다룰 때, 변진의 선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데, 거기에는 인간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그녀가 마치 문화토착화(Inkulturationsprozeß)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결국은 문화토착화에서 그녀의 예술적 고향을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주 강력하게 전통적인 성상학(Ikonographie)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태도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표현하는 작품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은 불안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저하고 연약하고 의심하면서 등장할 뿐, 그들이 진정으로 존재하기 원하는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교자들에 대한 그녀의 작품은 전혀 다르다. 이 작품세계에서는 예술적 환상이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충격적인 사건들에 견고하게 집중하고 있는데, 이 사건들은 잊혀질 수 없고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강하게 한다.

수준 높은 서사 기법(Erzahlkunst)과 작품이 주는 확신이 과거를 현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족의 슬픔, 수없이 쌓아 올린 잘린 목들, 피처럼 붉은 배경에서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인을 죽이고 있는 죽음의 여신. 그러나 처형대로 향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편안하게, 확신을 가지고 정면으로 죽음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고난의 가시면류관이 흔들리고 있지만, 신실한 사람들에게 약속된(요한목시록 2,10) 생명의 면류관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어디에서 이들은 이런 내적인 힘을 얻는가? 하느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아주 가까

이 계신다. 비둘기와 사라지는 가시면류관은 예술가의‘암시’(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한)인데, 그녀는 이로써 고통스럽고 위험한 시대를 받아들이면서 현재화하고 있다. 릴케의 시를 다시 회상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그림들과 암시로 세계를 점차 받아들일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약하고 위험한 세계의 부분을.’

다음으로 우리는 두 사람의 다른 여성 예술가들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들에게는‘모방을 통한 배움’이나‘문화토착화’의 필요성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이들은 세계시민이고, ‘현대’에 속하며, 오늘의 세계를 지금 여기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작품 대상과 소재, 사회적 세계, 간단히 말해 인간과 그 세계를 지향하는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이들은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문화적 특징에 대한 질문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들은 세계시민이고 세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물론 한국적 배경이 꼭 함께 고려될 필요는 없다.

장상건 선생은 지금까지 언급한 예술가들과는 구별되는데, 그것은 그가 색채유리예술가 (Glaskunstler)이기 때문이다. 유리예술은 유럽에서 중세 초기에 대단한 발전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창의 색유리가 직접적으로 계시의 빛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두란두스 폰 멘데(Durandus von Mende, 1230-1296) 주교가 말했듯이, 고딕(Gothic)풍의 색유리창은‘거룩한 경전’이 되었다. 다시 말해‘진정한 태양의 맑은 빛, 즉 하느님의 빛을 교회 안으로 비추는, 곧 신앙인과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빛’이라는 것이다. 성당의 아름다운 색유리창은 신앙의 현실성을 형상화한다: 교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밖에서 보이는 교회는 빛도 색깔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태양빛이 창을 통해 교회 안을 비출 때, 교회는 온통 빛으로 충만하다. 계시의 비밀도 그와 같다. 그리스도교 신앙은‘내면으로부터’ 거기에 참여할 때, 성령이 마음과 이성을 조명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중심투시도법이 소개되고, 제네바 종교개혁이 모든 예술을 거부한 사건은 색 유리창의 거룩한 의미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19세기에 색유리예술이 다시 부흥하려고 했지만, 고딕 시대 색유리창의 깊이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색유리예술은 역사화로 퇴색되었고, 유리에 색칠하는 작업이나 삽화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 색유리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성서’(Biblia pauperum)로 천박해졌다. 그래서 색유리예술이 거룩한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유리예술’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장상건 선생의 작품세계는 바로 이 교차지점에 서 있는 것 같다. 물론 장 선생의 작품세계가 교회유리예술의 장르에 포함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머리를 전통적인 성상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창백한 회색으로 그리거나, 후광을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빨간색으로 그린다든지, 청색이 하늘의 멀리 있음과 우주적 배경을 알게 하는 것 등은 그의 그리스도상이 역사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 선생의 비구상작품들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

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것이 교회의 창이라면 교회를 찾는 이들이 태양빛이 비출 때마다 기억해야 할 창조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시에 장 선생은 이른바 세속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이들은 순수한 예술작품으로서 오직 미학에만 헌신한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초월의‘부가가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리가 완전한 아름다움을 방출하게 하는 것은 바로 빛이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최고의 민감성을 가지고 유리를 틀에 끼우고 납으로 된 다양한 형태의 격자로 고정시키는데, 납 격자의 형태들은 위협과 보호의 느낌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유리는 빛을 사로잡고, 동시에 새로운 집합상태에로 빛을 가져오며, 신앙의 빛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위협받는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형상화한다.

한혜선 선생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1년부터 1995년까지 파리에서 공부했다. 파리에서 에콜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와 파리8대학에서 조형미술학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예술교육을 거의 프랑스에서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대했을 때, 내가 받은 첫 번째 인상은 현대 프랑스 화가들이 아니라, 오히려 뉴욕 학파의 주요 화가인 톰블리(Cy Twombly, 1944 - )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톰블리의 작품을 내가 처음 대한 것은 1970년대 카셀(Kassel)에서 열린 기록전시회에서였다. 뉴욕 학파는 1930/40년대부터 당시 독일과 네델란드에서 대표적이었던 순수하고 추상적인 그림에 반항했다. 뉴욕 학파는 행동하기를 원했고, 작품의 대상이나 스타일과 매체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어떤 것도 미리 주어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원초적인 문화들, 예를 들면 인디언들의 원초적인 문화들을 그들은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미 피카소(Picasso)와 독일 표현주의는 이 길을 가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한혜선 선생의 최초의 예술적 고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선생은 인간을 자주 가면(Maske)으로 축소시킨다. 이를 위해 그녀는 그리스 초기의 연극들의 예를, 그러나 무엇보다 원초적인 종교들의 예를 취하고 있다.

그녀의 도록을 살펴보면 빈번하게 그녀가 형상들을 아주 검은색이나 흰색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끔 두 개의 가면들이 등장하거나, 두 사람이 등장할 때에도 그들은 서로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는다. 관계의 깊은 단절, 절망과 우울이 특징적이다. 내 생각에 한혜선 선생의 예술세계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내적인 실존의 낯설음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사회적.문화적 전환기에 느끼는 실존적 불안이다. 사르트르(J.P. Sartre)는 “지옥 -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타자는 전혀 작품 속에 먼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검은색, 하품하는 하얀색의 공허함, 차가운 회색 속으로 타자는 삼켜지고 있다. 그녀의 작품, ‘Amour’는 그에 대한 뚜렷한 예다. 보라색 배경(보라색은 회개와 절망의 색이다)에 두 개의 긴 상자가 서 있다. 두 개의 상자는 움직이지 않고 곁에 서 있다. 문들은 닫혀 있는데, 심장으로 닫혀 있다! 사람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사람은 집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이 실존적 상황이다: “삶은 고독하고,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고, 모두 홀로 있다”(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에서 인용).

가끔 단색의 배경이 세 개의 잎을 가진 꽃들에 의해서, 마티스(H. Matisse, 1869-1954)가 말했던 것처럼, 생기를 얻는다. 그러나 마티스의 작품과 달리 그녀의 작품으로부터는 삶이 나오지 않는다. 단순하게 표현한 타일 형상들도 삶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삶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있다.

한혜선 선생은 종교적인가? 그렇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많은 경우,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처럼 비어 있는 하늘을 두드리면서, 모든 이성적인 것에 대항하면서도 어떤 응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 실존주의에는 거의 신비주의적인 가톨릭 사상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의 작품, ‘Fontaine’과 무엇보다‘Priere’는 이 방향을 가리킨다. 결정적인 답변은 그녀의 작품, ‘Racine’6)와‘뿌리’(Wurzel)가 제공한다. 검은색 배경에서 검은색의 항아리가 돌출하고 있는데, 단지 외형적 형태만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검은색 항아리로부터 하얀색의 성배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데, 그 성배의 윗부분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다. 성배에

는 한 사람의 얼굴이 아주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다. 모래 같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작품의 오른쪽에는 작은 가시면류관이 성배와 결합되어 있다. 갈색의 척박한 땅은 다시 생명력을 얻어 녹색이 되기 위해서 성배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한 선생이 주려고 하는 신학적 메시지에 가까이 가게 된다: 우리 삶의 어두운 밤은 오직 그리스도의 빛, 성만찬에서 우리를 비추는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만 밝아질 수 있다. 대지의 얼굴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구원의 성배가 여기에 있다.

이춘만 선생은 1941년에 태어나, 1962년 서울대학교 미대 조각과를 졸업하고, 석사학위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취득하였다. 이춘만 선생에게 문화토착화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예술 세계는 이미 문화토착화단계를 넘어섰다. 그녀의 예술적 콘텍스트는 한국이지만, 한국이라는 한 나라와 그 문화에만 속해 있지 않다. 지역적 예술은 지구적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아주 훌륭한 표현은 아니지만, ‘지구지역화’(Globalisierung)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춘만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M. Rilke)는 헤르만 헤세(H. Hesse)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예술의 시작은 경건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경건, 모든 경험에 대한 경건, 모든 사물에 대한 경건, 위대한 이상형에 대한 경건, 익히지 않은 자신의 힘에 대한 경건.”하느님에 대한 경건이야말로 가장 최후의 단계, 가장 위대한 고리(Ring)이다. 만일 우리가 경건이라는 단어를 중세 후기 독일어에서 유래하는 의미, 곧 힘, 신뢰, 존경으로 대체한다면, 이춘만 선생의 작품의 특징을 훨씬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을 것 이다.

오늘까지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작은 여성 예술가인 이춘만 선생이 놀라운 힘과 에너지, 열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엄청난 돌을 앞에 두고 망치와 끌로 직접 작업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순교자 상들에 대한 웅장한 기억을 돌 안에 망치로 쪼아내었다. 같은 강도로 그녀는 나무와 철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형상을 만든다. 길을 가다가 발견한 돌, 기왓조각에도 그녀는 존경심을 가지고, ‘경건’하게 접근하면서, 그것들이 그녀의 예술작업을 위한 생동하는 대상이 될 때까지 소통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기 주변의 경험 세계, 나무와 돌, 우리 주변의 세계 모두가 이춘만 선생의 예술에서는 설득력 있게 종합 (Synthese)을 이룬다. 그녀의 예술은 하나의 목적, 곧 인간을 더 잘 이해하려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그녀는 인간을 위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고난과 기쁨, 억압과 불의와 차별에 저항하는

인간을 진지하게 인식한다. 그녀는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사회에서 박탈당한 존엄성을 인간에게 되돌려 준다. 이 점은 무엇보다 여성에게 적용되는데, 여성에게‘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 (창세 3,20)로서 특별한‘경건’, 즉 특별한 존경이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의 신학적 미학의 핵심이 이춘만 선생에게서 실현되고 있다. 하느님은 가난한 마구간에서 세상으로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셨고, 인위적이지 않고 단순하게 기록된 복음서들을 통해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은 가장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가장 낮은 존재로서 자신을 입증하신다. 가장 낮은 것(Humilis)과 가장 초월적인 것(Sublimis)이 하나가 된다. 이춘만 선생이 작품을 통해 이 두 가지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녀 작품의 깊은 아름다움이다. 이런 깊은 아름다움이 거친 표면 아래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나는 이춘만 선생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의미의 근거를 본다.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상 안에서 그녀는 고난받는 인간,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인간의 원형을 본다. 수평과 수직의 들보로 형성된 십자가는 삶에 필요한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고, 인간의 생각보다 높고, 겉으로는‘아름다운’예술, 곧 하느님에 대한 경건함의 차원, ‘하느님의 능력의 어두운 고리’(라이너 마리아 릴케)에서 살지 않는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 평화를 가리킨다.

끝으로 마지막에 언급한 두 사람의 여성 예술가의 작품세계가 보여주는 두 가지 차이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한 번 세 사람의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세계의 독특성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혜선 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녀의 작품에서 이집트 예술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집트의 예술원칙, 언제나 같은 것을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이집트인들은 무언가 정보를 주려고 했다. 이집트 예술은 촘촘하게 그린 그림에 자료와 정보를 응축시킨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그렇다. 그러나 한혜선 선생의 예술은 그와 반대로 그녀의 실존이해를 근거로 정보를 감추고 숨기고 있다. 아니 모든 형태의 정보 전달에 저항하고 있다.

그런데 이춘만 선생의 작품은 다르다. 그녀의 작품은‘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농축된 정보들의 저장실 같다. 다리 하나, 머리 움직임, 조각 작품에서 볼 수 있는‘빈 공간’, 모든 세부가 정보를 말하고 전달하고 있다. 그녀의 형상들은 말하고 무언가 전달하려고 한다. 까닭은‘모든 부분이 입’이기 때문이다.

이춘만 선생은 심근경색으로 거의 죽을 뻔했던 경험을 겪은 후부터, 그때까지 써오던 일기를 더 이상 쓰지 않고, 여행길에 매일 경험한 것을 기억하게 하는 작은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돌멩이에 그림을 그리고, 코르크 마개를 모아 붙일 때에도 그것들은 그녀가 붙들고 있는 일상생활의 작은 것들이 아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 위에 우표를 붙이거나, 여러 나라에서 모은 예술엽서의 조각들을 붙여 만든 콜라주 작품에서 그녀는 서구예술과 한국예술의 기억의 연출목록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이로써 보편적 예술세계에 대한 문화적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변진의 선생의 순교자 상은 과거를 현재화하려고 한다. 현재화(Vergegenwartigen)한다는 것은 과거를 변화시키지 않고, 가능한 한 손상시키지 않으며 우리의 현재에로 불러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춘만 선생은 그녀의 작품 속에 기억들을 모으고 있다. 기억은 인간의 내면 세계와 관계 되어 있고, 기억의 깊이, ‘기억하면서 가라앉는 근거’9)와 관계되어 있다. 이춘만 선생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그녀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가라앉아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새로운 삶을 형상화하고 있어,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기쁨, 세계와 창조주에 대한 새로운 통로를 획득할 수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재건을 위해 뜻을 동참해 주신 다섯 분 (이춘만, 변진의, 김일영, 한혜선, 장상건)의 작가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춘만 Lee, Choon-Mann

1982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196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서울조각회, 대한민국미술협회, 서울가톨릭미술가협회,

서울시립미술협회 회원

변진의 Byun Jin-Eui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김일영 Kim Il-Young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동 대학원 조소과 졸업

Nazionale Accademia Belle Arti Di ROMA 졸업

월터 만치니 국제콩클조각부분 대상 (이탈리아, 1986)

한혜선 Han Hae-Sun

파리국립미술학교 드로잉학과 졸업

파리국립미술학교 회화과 졸업

파리8대학 조형예술학과 석사 졸업

장상건 Jang Sang-Gun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파리 국립고등응용미술대학교 졸업 (국가학위 취득)

한양대학교 미술대학교 금속디자인 대학원 졸업